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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주자의 학문
주자는 송대가 낳은 위대한 학자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주자는 북송의 여러 학자들의 사상을 총집대성하여 주자 자신의 사상체계를 완성하였다. 우주론에 있어서는 주렴계의 태극도설을 수용하고, 정명도, 정이천에게서는 이(理)를 수용하고 장횡거에게서는 기를 취하여 이를 교묘히 융합하여 이기철학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소강절에게서는 주역의 상수학(象數學)을 취하여 사물의 변화를 설명하고자 하였다. 이와같이 주자는 북송 학자들의 사상을 골고루 취하였으나 근본적인 철학적 입장은 정이천의 이(理) 사상을 계승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주자학을 따로 정주학(程朱學)이라고도 일컫는데 이것은 주자학이 그 연원으로 따질 때 정이천에 바탕한다는 뜻에서 생겨난 호칭이다.
여기서 잠간 주자학을 중심한 송대 학문의 호칭에 관하여 설명할 필요가 있을듯 하다. 송대철학을 일러서 이학(理學), 성리학(性理學), 도학(道學), 주자학(朱子學), 정주학(程朱學) 등 다양하게 일컫는다. 이들의 학문적인 개념상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이학(理學)은 글자 그대로 이(理)를 탐구하는 학문이다. 송대 유학의 특색은 철학화에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송대사람들은 우주의 근본원리를 이(理)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므로 송대철학의 특색을 한 마디로 표현하여 이학이라고 한 것이다. 성리학(性理學)이란 말은 정이천이 「성은 이이다」(性, 理也)고 한데서 생겨난 말이다. 우주의 원리인 이가 사람에게 부여될 때 그것이 성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따지고 보면 성이 곧 이인 것이다. 그러나 이(理)는 일반적인 것이고 성은 사람에게 부여된 이라는 차이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냥 이학이라고 하지 아니하고 흔히 성리학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우리나라의 주자학은 대자연의 이보다도 인간의 본성문제를 특히 많이 다루었으므로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도학(道學)이란 학문과 실천을 결부시킨데서 생겨난 표현이다. 도(道)는 길이고 길은 사람이 걸어가야 하는 것이니 바로 실천과 관계되는 것이다. 많은 학문이 지식만을 문제삼고 실천을 문제삼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참다운 학문, 특히 송대에 있어서 강조된 학문은 실천을 중시했기 때문에 이를 도학이라고 했던 것이다. 주자학이란 주자에 의하여 체계화된 학문이고, 정주학이란 위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주자학의 연원관계를 따져서 생겨난 표현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송대철학은 여러가지로 표현되나 그 사상들은 대체로 주자학 속에 포괄된다고 할 수 있다. 주자학은 그만큼 집대성의 성격을 가졌기 때문이다. 주자의 학문은 송대학문을 집대성했을 뿐만 아니라 한․당 이래의 유학을 모두 집대성했다고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주자는 송대의 이학적 이론으로서 경서(經書)를 재해석했을 뿐만 아니라, 한․당 이래의 훈고학도 총집성했던 것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서 주자는 중국근세가 낳은 최대의 학자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주자학의 특성은 어디에 있는가? 주자학의 체계는 너무 방대하여 이를 한마디로 간략히 말하기는 쉽지 아니하다. 그러나 앞에서 말했듯이 송대학문은 유학을 철학적으로 해석한데 특성이 있고 그러한 학문을 집대성한 것이 주자학이므로 주자의 학문도 철학적 이론으로 유학을 체계화한 점에 그 특성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그 철학적 이론의 근본구조는 어떠한 것이었던가? 이것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이기이원(理氣二元)적 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우주만물은 모두 이(理)와 기(氣)라는 두 가지 근원적인 존재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러면 또 이와 기는 무엇인가? 이(理)는 모든 사물이 생겨날 수 있는 이치, 또는 원리이고 기(氣)는 사물을 이루는 근원적인 재료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가 우주만물을 이루는 가장 근원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주자의 철학은 쉽게 말하면 이 두 가지 근원적인 존재의 성질이 어떠한 것이며, 또 서로 어떻게 어울리며, 나아가서 어떻게 만물을 구성하며 변화시키는가를 설명하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자가 주장한 이기문제의 근원적인 규정 몇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 이기는 본질을 달리하는 두 존재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이는 사물의 원리, 또는 법칙이 되는 것이고, 기는 사물의 재료가 되는 것으로서 두 가지는 본질적으로 그 성질이 같지 아니하다. 주자는 이를 “완전히 다른 두 존재”(決是二物)라고 하였다. 그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이와 기가 어울려 비록 만물을 구성한다 할지라도 이와 기 그 자체에 있어서 변화가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기가 구성하는 한 사물 안에 있어서도 이는 이로서 있고, 기는 기로서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자는 말하기를 “이기는 서로 뒤섞일 수 없는 성질의 것”(理氣不相雜)이라고 하였다.
㉡ 이기는 항상 어울려 잇기 마련이다.
이와 기는 그 본질은 다를지라도 항상 어울려 함께 존재하기 마련이라고 한다. 세상만물은 모두 그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원리에 의하여 생겨나는 것이다. 그렇게 될 수 있는 원리가 없이는 아무 것도 생겨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없는 기는 있을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그 반면 사물과 관련되지 아니하는 원리란 그 존재의 의미가 없는 것이고 또 그런 원리는 사람이 알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러므로 주자는 말하기를 “이는 기가 없이는 의지할 곳이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와 기는 서로 의지해서 존재하는 것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이가 없는 기는 있을 수 없고, 기가 없는 이도 또한 있을 수 없다”는 표현을 하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인하여 “이기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성질의 것”(理氣不相離)이란 규정이 생겨난 것이다. 모든 사물에 있어서 이와 기는 항상 함께 어울려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주자가 규정한 이기의 기본적인 관계이다. 그러나 이기관계에 대한 주자의 규정은 여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위의 규정은 이기의 본질관계와 사물상의 관계에 대한 규정이라고 한다면 주자는 다시 이기를 시간과 공간상의 관계에서도 고찰하였다. 즉 이기의 선후이다.
㉢ 이는 기보다 앞선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기는 이 세상에서 가장 근본되는 존재이다. 가장 근본적이고 존재에는 시작이 있을 수 없는 법이다. 따라서 이에도 시작이 없고 기에도 시작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또 앞에서 보았듯이 이와 기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존재로서 한 사물로서 공간을 차지할 때 이와 기는 함께 존재한다. 그러나 굳이 이와 기의 선후문제를 따진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사실에 있어서는 선후를 따직 어렵지마는 논리적인 차원에서 그 선후를 따진다면 “이가 기보다 앞선다”(理先氣後)고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주자의 생각이다. 즉 공간적으로는 이기가 함께 존재하지만 시간적으로 생각하면 이가 기보다 앞서는 존재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 이는 선(善)하고 기는 선악을 아울러 가졌다.
이기의 가치문제를 두고 말하면 이는 순수하게 선한 것이고 기는 선과 악을 아울려 가졌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는 순수한 법칙이니 선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기는 이와는 달리 움직이고 작용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악이 싹틀 수 있는 소인을 가지고 있다. 기도 깨끗하여 아무런 움직임이 없을 때는 악하다고 할 수 없으나 이 기가 작용할 대 반드시 이법대로 움직인다는 보장이 없으므로 그 움직임이 이법에서 벗어날 때는 악이 거기서 생겨날 수 있는 소인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리학에서는 “이는 귀하고 기는 천하다”(理貴氣賤) 또는 “이는 선하고 기는 선악을 가졌다”(理善氣有善惡)이라고 표현한다.
㉤ 이기의 동정(動靜)의 문제
주자는 말하기를 「이는 생각(情意)도 움직임(造作)도 계획함(計度)도 없다」고 하고 「기는 쉴 사이 없이 오르락 내리락한다」고 하였다. 이로써 보면 이는 전혀 움직임이 없는 존재이고 기만이 운동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가 있다. 그러나 한편 이가 모든 것의 원리이므로 움직임의 원리도 이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주자는 말하기를 「이의 움직임과 고요해짐이 있기 때문에 기의 움직임과 고요함이 있다. 만약 이의 움직임과 고요해짐이 없다면 어찌 기의 움직임과 고요해짐이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이로써 보면 이를 움직임과는 전혀 관계없는 추상적인 존재로만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의 움직임이 있기 때문에 기의 움직임이 있다」고 할 때 그 움직임은 어떠한 움직임인가? 그것은 원리적인 움직임, 형이상학적인 움직임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움직임이 없는 움직임」(無動之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움직임은 현상의 사물이 움직이는 것과 같은 움직임과는 구별되는 형이상학적인 움직임이라고 할 것이다.
이상은 주자가 주장한 이기관계의 주요한 원리 몇가지를 추려 본 것이다. 주자는 이상과 같은 이기관으로서 자연의 본질과 현상, 사람의 심성과 행위, 만물의 변파 등을 설명했던 것이다.
(3) 주자와 퇴계선생
퇴계선생은 많은 유학자 가운데서도 특히 주자를 숭배하였다.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의 서문에서 「회암(晦菴) 주선생은 공자에 버금가는 자질을 타고 나셔서 유학의 도통을 계승하였나니, 도와 덕은 아득히 높고 그 남기신 사업과 공덕은 광범하고 위대한 것이었다. 경전의 뜻을 밝혀서 후세에 남기셨으니 이는 귀신들에게 물어 본다 할지라도 의심할 바가 없고, 백세 이후에 새로이 태어나는 성인이 본다 할지라도 의혹될 바가 없다」고 하였다. 얼마나 대단한 찬양인가? 기고봉(奇高峰)에게 준 편지 가운데서도 「주자는 내가 스승으로 모시는 분이고 또한 천하의 모든 사람과 고금의 모든 사람이 다같이 스승으로 높이는 분이다」고 하였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주자는 송대의 유학을 집대성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거슬러 올라가서 한․당대의 유학까지도 총집성한 위대한 학자이다. 그러므로 퇴계선생의 주자에 대한 숭배는 위에 본 바와 같이 철저했다. 자신이 위대해야 남의 위대함을 비로소 아는 법이다. 과연 퇴계선생이었기에 주자를 그렇게 높일 수 있었다고도 할 것이다.
퇴계선생이 주자의 학문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40세가 넘어서인듯 하다. 「주자서절요」 서문에 의하면 중종 38년에 왕명으로 『주자대전』이 간행됨으로써 처음으로 『주자대전』을 접하게 되었다고 한다. 『주자대전』이란 주자사상을 총집성한 주자전집을 말함이다. 이 때 퇴계선생의 나이 43세였다. 그 때까지는 『주자대전』이 널리 보급되지 못했고, 퇴계선생 자신도 이런 책이 있는 줄도 몰랐고 또 그 내용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이 책이 새로 간행됨에 이를 구하여 병으로 관직을 쉬게 되었을 때 고향으로 돌아와 조용히 이 책을 읽게 되자 비로소 이 책에 대해서 무한한 흥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하였다.
퇴계선생이 『주자대전』에 얼마나 깊이 빠져 들었던가는 학봉(鶴峰) 김성일(金城一) 선생의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선생께서 『주자전서』를 서울에서 구하여 오신 후로 문을 닫고 조용히 읽기에 열중하여 아무리 더운 여름이라도 중단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여름에 혹 탈이 나지 않을까 염려하면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책을 읽으면 속이 시원하고 저절로 서늘한 기운이 생겨나 더운 줄도 모르게 되니 무슨 탈이 나겠는가?」고 하셨다.
다시 학봉이 기록한 「언행록」의 일절을 인용해 보자.
선생댁에 『주자서』를 베껴 쓴 책이 한 질 있었는데 매우 낡고 글자도 모두 닳아서 헤어졌다. 이것은 너무 여러 번 읽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 후 『주자서』가 사람들에 의하여 자주 인출(印出)됨에 따라 새 책을 구하기가 쉬워졌다. 새 책을 구하게 되면 선생께서는 반드시 잘못된 글자를 고쳐 쓰신 후에 다시 한번 익히셨다. 그리하여 장(章)마다 환하게 익히시고 구(句)마다 완전히 익혀서 그것을 응용하시되 선생 자신의 것인양 자유로왔다. 그러므로 일상생활에 있어서 말씀하시는 것과 행동하시는 것과 사양하고 받아들이는 것과 세상에 나아가고 물러서는 그 원리가 이 책의 내용과 들어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사람들이 혹 의문을 가지거나 질문을 하게 되면 반드시 이 책을 빌어 대답하시는데 실정에 맞지 않거나 도리에 적합하지 않는 것이라곤 없었다. 이것은 실로 그 이치를 바로 보고 바로 깨닫고 또 바로 믿어서 마음에 푹 젖어 들고 신명(神明)이 합치했떤 까닭이요, 결코 책으로 읽기만 하거나 귀로 듣고 입으로 외우기만 하여서 되는 일이 아니다.
위의 학봉의 두 기록은 퇴계선생이 『주자대전』에 대하여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얼마나 알뜰하게 그 사상내용을 탐구했던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문자의 쓰임새가 같지 않은 우리나라 학자로서 『주자대전』을 완전히 익힌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퇴계선생이 『주자대전』의 내용을 응용하되 마치 내것인양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그 공부가 얼마나 철저했던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읽고 또 읽어서 책장이 허물어지고 자획이 닳어 없어졌다는 것이 그 철저한 공부를 실증함이다. 언어문자란 부단히 변하는 것이다. 송대의 문자의 쓰임새는 한․당대의 문자의 쓰임새와 같지 않다. 한․당대의 고대 한문형식에 익숙한 우리나라 학자로서 『주자대전』을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퇴계집』 가운데는 퇴계선생의 제자들이 퇴계선생에게 『주자서』 가운데 나오는 알 수 없는 문구들에 대한 질문이 수없이 실려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대하여 퇴계선생은 거의 막힘이 없이 해답을 내려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퇴게선생이 그만큼 『주자대전』의 내용에 대하여 환하게 밝았다는 것을 말함이다. 그러므로 일본의 주자학자로서 퇴계선생을 숭배했던 산기암재(山崎暗齋)는 주자이후 수많은 주자학자가 있었지만 「퇴계선생이 제1인자」라고 분명히 말했던 것이다.
주자를 가장 잘 알았던 퇴계선생은 그만큼 주자를 철저하게 신봉하였다. 퇴계선생은 주자의 학문적인 이론만을 신봉하고 따랐던 것이 아니라 주자의 행동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그대로 본받으려고 하였다. 학봉의 기록에서 보았듯이 말하고 행동하는 것, 거절하고 받아들이는 것, 세상에 나아가고 물러서는 것 등을 그대로 본받았던 것이다. 그것이 단순한 맹목적 흉내가 아니라 그 하나 하나가 모두 의리에 맞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유학은 본래 지식만을 추구하는 주지주의 일변도의 학문이 아니라, 말과 행동이 합치하기를 바라는 학문이다. 이것을 도학(道學)이라 한다고 했거니와, 퇴계선생은 주자를 학문적으로 인간적으로 마땅히 배우고 따라야 할 스승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퇴계선생은 주자의 학문을 스스로 실천하는 한편 주자의 학문을 철저하게 옹호하려고 하였다. 그것이 곧 진리를 지키는 일이요, 진리를 밝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퇴계선생은 주자학적 이론과 반대되는 많은 학설을 비판하였다. 중국학자로는 주자학을 반대한 왕양명(王陽明)의 학설을 비판하였고 주자학자이면서 주기(主氣)로 흐른 라정암(羅整菴)을 비판하였고, 또 우리나라 학자로는 주기(主氣)의 입장에 선 서화담(徐花潭)과 화담의 제자 이연방(李蓮坊)을 비판하였고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 주해석을 통하여 선학(禪學)에 물든 노소재(盧蘇齋)를 비판하였고, 사칠이기논변(四七理氣論辯)을 통하여 이와 기를 하나로만 보는 기고봉(奇高峰)의 견해를 비판함으로써 주자의 올바른 이기관을 드러내려고 하였다.
퇴계선생은 주자의 학설을 옹호하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적극적으로 주자의 사상을 전파보급하고 그 학맥이 면면히 이어가기를 희망하고 또 이를 위해 노력하였다. 그 작업이 곧 『주서절요』(朱書節要)와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의 편찬이라고 할 수 있다. 『주서』는 『주자대전』 가운데 실려 있는 주자의 편지를 말함이요, 『주자대전』이 총 100권인데 그 가운데 편지글이 제24권에서 제64권까지 40권에 걸쳐 실려 있으니 전체의 거의 절반에 가까운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옛날 학자들은 편지를 통하여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일상생활을 교환하기도 했지만 한편 학문․사상에 관한 질의․응답 등을 주로 편지를 통하여 교환했던 것이다. 주자의 편지글이 그렇듯 많은 것은 제자들과의 학문적인 교류를 그만큼 많이 했다는 증거이다. 이 많은 편지글을 사람마다 모두 읽고 그 사상내용을 이해하기란 여간 큰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퇴계선생은 이 많은 편지글 가운데 주자의 사상이 잘 표현된 것, 또 후세 사람으로서 공부하는데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편지들만 골라 뽑아서 14권 7책으로 하여 이를 『주서절요』(朱書節要)라고 했던 것이다. 「절요」란 중요한 것을 골랐다는 뜻이다. 퇴계선생이 이와같이 『주서절요』를 편찬한 것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손쉽게 주자학에로 인도하려는 깊은 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서절요』의 서문에서 퇴계선생은 밝히기를
이 편지들은 사람의 재능의 높고 낮음과, 학문의 깊고 얕음에 따라서 병에 맞춰 약을 주고, 무게에 따라 저울질 하듯이 어떤 때는 추켜 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이끌어 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도와 주기도 하고, 또 더러는 격려하여 나아가게도 하고, 더러는 물리쳐 경고하기도 하였다. 그 마음씀이 자세하여 털끝만한 악도 용납하지 아니하고, 의리를 밝힘에 있어서는 털끝만한 차이도 앞질러 지적해 내고 있다. 규모가 크고 마음씀이 엄밀하여 마치 엷은 얼음위를 걸어가듯 조심하는 마음을 게을리 아니하고, 자기를 되돌려 살펴 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마음이 행여 해이하여질까 부지런히 부지런히 노력하여 스스로 날로 향상하고, 남을 일깨워 주고 이끌어 줌에 있어서 나와 남의 구별이 없다. 그러므로 그 말들이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을 받아 일어나게 하는 바가 있다. 이런 사실은 당시의 문인들에게만 한한 것이 아니고, 백세의 뒤에 있어서도 그 가르침을 듣는 사람은 마치 마주 대해서 일러주는 말을 듣는듯 함을 느끼게 된다. …… 사람이 학문을 하려면 반드시 자극을 받아 일어나는 계기가 있어야 하는 법이다. 세상에는 훌륭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 많고 성현의 글을 읽고 부지런히 외우면서도 도학에 힘쓰는 사람이 없는 것은 그 단서를 터줌이 없고 그 마음에 느끼게 하는 계기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 이 편지글은 한 때의 스승과 제자간에 학문의 내용을 밝히고 공부에 관한 방법을 이야기하는 평범한 이야기와는 다르다. 이 편지 속의 말들은 모두가 사람의 마음을 일깨우게 하지 않음이 없다. …… 학자로 하여금 마음에 크게 감동을 주어 참답게 알고 이를 실천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이 책 외에 또 무엇이 있으랴?
고 하였다. 퇴계선생은 『주서절요』로서 많은 사람들이 올바른 학문에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로 삼으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것이 또한 주자학의 진작이기도 한 것이었다.
퇴계선생이 주자학의 올바른 전승의 맥을 밝히려고 편술한 책이 곧 『송계원명이학통록』이다. 퇴계선생은 『주자대전』, 『주자어류』 등 자료를 이용하여 주자와 더불어 학문적인 관련이 있었던 제자와 후대 즉 원(元), 명(明)대의 주자학자들을 총망라하여 이를 조사하여 그들의 이력과 학문, 사상을 정리하여 이를 『송계원명이학통록』이라고 하였다. 여기에 실린 사람의 수는 총 516명이다. 이학통록의 서문에서 퇴계선생은 밝히기를
이 통록을 펴내는 것은 여기에 실린 사람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들을 앎으로써 도학의 정신을 밝히자는 것이다. 그 당시 주자학은 옳지 않은 학문(僞學)이라 하여 법으로 금하도록 한 때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과감하게 일어나 도에 뜻을 두고 위험을 무릅쓰고 주자의 가르침을 청하고 학문에 관하여 질문함으로써 주자의 뜻을 드러나게 하였다. 비록 묻는 사람은 각양각색으로 다르지만 선생의 대답은 개개인의 경우에 맞추어서 더러는 들추기도 하고 더러는 억누르기도 하였으니 어느 것이나 지극한 가르침이 아닌 것이 없었다. 이 지극한 가르침은 결국 이것을 물어온 사람들로 인하여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으니 이제 그들을 다 기록에 넣는 것이 이 학문(斯道)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맹자는 말하기를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물리칠 줄 아는 자는 성인의 무리라고 하였는데 나도 주자의 도를 존중할 줄 아는 자는 다 주자의 무리라고 말한다.
이 서문에서 짐직할 수 있듯이 퇴계선생은 자신이 절대적인 진리라고 생각했던 주자학을 세상에 널리 펴야겠다는 강한 사명감으로 이 이학통록을 펴냈던 것이다. 학문적으로 유명하든 말든 관계없이 주자학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은 모두 진리의 사도로서 인정하고 이를 수용함으로써 진리의 동반자임을 밝히려고 했던 것이다.
위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퇴계선생은 철저하게 주자를 숭배하고 그의 학문을 세상에 널리 펴려고 노력한 학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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